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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ibetan


제목The Tibetan
출간일2019년 3월23일
저자양병만

판형280*280
제본북클로스 양장제본
언어국문/영문
페이지수164쪽
ISBN978-89-962469-2-3
정가80,000원



출판사 노트

50세가 되던 해, 사진기를 든 양병만은 2012년부터 18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티베트를 여행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른 나이부터 삶의 고난을 마주하며 자아에 대한 물음을 멈추지 않던 사진가는 인생의 후반부에 발견한 마음의 고향에서 카메라를 들고 의식과 무의식이 완전한 합치를 이루는 순간들을 기록한다. 스스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작동되는 질서’라고 정의한 그 불가해한 장면들은 사진가의 지극히 사적인 내면의 투영이자 티베트 사람들의 내밀한 현재를 드러낸다. 그의 카메라는 사진가의 안과 밖을 동시에 겨냥하고 있다.
사진집은 1부 티베트 사람들과 2부 다르첸 가는 길이라는 부제를 달고 각각 30여장의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티베트 사람들에는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짧은 글을 필두로 사진가의 시선에 포착된 티베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전개된다. 2부 다르첸 가는 길에는 우주의 중심이라고 숭상되는 카일라스 산 바로 아래 위치한 거점 마을 다르첸이라는 곳을 진정한 삶의 출발이자 궁극에 대한 은유로 제시한다. 사진기를 든 이후, 그에게 처음으로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던 사진 한 장을 필두로 수년간 네차례나 티베트를 오가며 촬영한 양병만의 사진들은 마치 그가 살아 온, 그리고 살아 갈 인생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사진집 타이틀이 티베트사람들이란 고유명이지만 실상 그 누구라도 자신의 삶의 얘기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보편성이 사진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사진집 뒤편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양병만의 사진세계와 사진작업의 의미를 사진가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




인터뷰

왜 티베트인가?


예전부터 티베트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하고고 있었는데 사진을 시작하고 2013년에 처음 티베트를 가게 되었다. 그때 마음속에 혼란스러울 만큼의 울림을 가지고 돌아왔다. 계속 티베트를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2014, 2016, 2018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다녀오게 되었다.

왜 티베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평소 불교에 대한 탐색을 지속하던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스스로 일정 시점에서 의식의 독립을 이루게 되는데, 나는 가정의 보살핌을 받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이른 나이에 경제적, 의식적으로 독립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불교에서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상태를 직시하기 위해서 자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늘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현실과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의식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충돌 속에서 화해되질 않았다. 50이 되던 해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꿈이 사진을 만나면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사진촬영을 위해 처음 가본 티베트가 놀라웠던 이유는 불교적 고행과 인간의 보편적 삶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자연의 거대한 실체와 그 안에 투영된 그네들의 삶, 불교도의 자세와 일상의 모습, 이 모두가 하나의 염원으로 티베트 사람들의 미소와 눈망울 속에 담겨 있었다. 마음의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그동안 나를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던 견고한 벽 너머, 어떤 울림이 더듬거리며 전해졌고 몸과 마음을 그곳에서 열 수 있었다.






안목 리뷰

그러면 모든 탐구의 끝은 출발했던 곳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 장소를 처음으로 아는 것이리라.
T.S. 엘리엇

그곳은 몸과 몸이 겹치고 마음과 마음이 겹쳐서 산이 되고 강이 되어 흐르는 곳.
거친 흙의 표면을 어루만지며 칠흑 같은 전생부터 영원까지 연결되는 그 길들을 따라
그의 눈은 지칠 줄을 모른다.
양병만의 티베트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티베트 사진들과는 거리가 멀다.
더는, 순진무구한 얼굴도, 자연도, 역사도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시짱 자치구의
티배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시짱자치구와 티베트사람들, 그것은 이미 어긋난 조합이다.
그 어긋남은 반세기 전에 시작되었고 수많은 죽음이 뒤를 이었고 수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야했다. 가는 곳마다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하는 검문소들, 거리를 차지한
공안들의 유일한 목적은 은밀히 퍼져있는 독립의지를 잡아내는 일이다.

티베트에서 양병만은 머물고 떠나기를 반복한다. 사진가의 발걸음이 멈출 때,
여지없이 그곳엔 빛과 그림자와 사람들이 있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가 있고,
어딘지 쓸쓸한 햇살이 있고, 먼 산을 보거나 고개를 떨구거나, 당구를 치거나,
빈틈없이 차지한 중국기 사이로, 마치 피바람에 찢긴 살점들처럼, 날아가지 못하고,
어느 집 꼬챙이에 걸려버린 오색 천들이 나부끼고 있다. 빛이 우세한 걸까?
아니면 그림자가 우세한 걸까? 빛과 그림자의 아슬아슬한 대립은 사진의 밀도를
증폭시키는데, 결국 사진은 빛을 담는 것이고, 그 빛은 그림자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삶이 바뀌어버린 티베트의 현재에 대한 암시인가? 그의 사진에선
종종 위험한 징후가 감지된다.

살아간다는 것, 지킨다는 것, 무너진다는 것, 어느 젊은이의 가슴속에
말 못 할 비밀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고통은 숨을 죽이고, 어느 길가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나온 티베트 사내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우리를 직시한다.
손가락 하나가 하늘을 뚫을 수는 없어. 궤멸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야.
말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 사진으로 찍힐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노란 점퍼를 입은 한 청년이 도로 위에 널려 있는 상품을 ‘보고’ 있다.
상품을 파는 상인은 손님도, 상품도 아닌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팔려는 의지도, 사려는 욕망도, 팔리고 싶은 의지도, 사진 속에는 없다.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따스한데, 벌거벗은 산은 도로변의 무덤같다.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선뜻하게 여겨져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저 불온한 숫자를 번호판으로 버젓이 단 하얀 트럭의 짐칸에 실린 두 여인은
어디로 가게 될까. 애처로운 것은 사라지는 빛이고, 어깨를 웅크린 여인들이고,
살갗을 파고드는 예리한 한기 앞에 속수무책인 나 자신이고, 해 저무는 바닥에 깔린 슬픈 삶들이다.
단 한 장의 사진도 같은 빛이 없고 같은 그림자가 없으니
사진의 온도를 느끼는 것, 이것이 ‘보는’ 것이다.

마지막 촬영연도가 2018년, 첫 촬영연도가 2012년이다. 그는 6년 동안,
4차례에 걸쳐 티베트를 떠돌아다니며 정작 떠돌아다니는 것이 법령으로 제한된
티베트 사람들을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왜 저 멀고 먼 고원에 사는 사람들이
이토록 그의 시선을 이끌었을까?



[출처] 안목 네이버 블로그 : blog.naver.com/anmocin